한국형 미라를 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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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대 재학 중에는 취미 생활에 더 열심이었어요

김 교수가 의사의 길을 결정한 건 어릴 때 심하게 앓았던 중이염이 계기가 됐다. 증세가 심해 청력을 잃을 뻔하기도 했는데, 그때 한 이비인후과 의사가 그를 성심으로 치료해준 덕분에 완치할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해 의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의대 진학으로 이어졌다. 고려대 의대에 진학한 김 교수는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검도에 눈을 돌렸다. 학교 공부는 뒤로하고 검도에 매진했고, 이후에는 학생회장을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결국 그는 대학병원 수련의 시절 가장 지망하고 싶던 정형외과 지원을 포기해야 했다. 학교 성적이 나빠 신입의사를 뽑는 인원수(TO)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차선책으로 생각하던 병리과를 선택했다. 그는 “당시 병리과를 선택한 것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 병리학 공부를 하다 보니 미라를 탐구하게 됐어요

막상 공부해보니 병리학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글로만 배워 이해가 잘 안 됐던 의학지식들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미경으로 세포도 관찰하고, 부검도 하고, 틈틈이 법의학 공부도 병행했다. 기초의학자로서 의사 교육, 사인 규명 업무도 재미있었다. 군 생활은 병리학 전문의를 딴 다음 육군과학수사대에서 했는데, 감식, 필적감정, 거짓말탐지검사, 사진, 증거, 익사체검사 등 수사 과정에서 필요한 의학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 심지어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총기사고 증상도 공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쌓인 병리학, 법의학적 지식이 결국 미라연구자로 발돋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김 교수가 미라를 처음 접한 곳은 영국 미라전시관이었다. 어쩐지 미라에 흥미를 느껴 여러 차례 찾아가서 구경하곤 했고 이후 개인적으로 고병리학을 공부하며 지식을 쌓아 나갔다. 그러던 중 2001년 우연찮게 발견된 미라 한 구가 김 교수 앞으로 도착했다. 그 미라가 바로 유명한 ‘파평윤씨’ 미라다. 산모가 출산을 하려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사례로, 복중에 태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미라였다. 이 연구를 앞장서 진행한 김 교수는 이후 ‘미라 전문가’ 반열에 올랐다. 그가 주로 연구하는 것은 미라의 사인 규명이다. 이 미라는 이 시기에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을까. 그 원인을 밝혀 현대 의학 발전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500년 전 조선시대에 죽은 미라가 기생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기생충의 종류까지 알아낼 수 있다면, 이런 정보는 현대에도 도움이 된다.  


■ 좋은 연구자의 기본은 끝없이 의문을 갖는 거예요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수동적이기보다는 적극성을 띌 필요가 있다”며 “어떤 점에 대해 끊임없이 원론적인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식이 부족하다면 무조건 따라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자신이 흥미를 갖는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 스스로 주도적으로 의문을 갖고 공부하는 태도가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실제로 그가 국내 미라 연구를 개척하지 않았다면 국내에 미라 전문가가 배출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김 교수는 “지금도 연구를 완전히 끝내지 못한 미라를 7구나 가지고 있다”며 “이런 미라를 추가로 연구하는 한편, 2000년대 구식 현미경으로 촬영했던 조직표본 등을 다시 촬영해 첨단 디지털 자료로도 남겨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의대 병리과 교수 김한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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